오모리

오모리

제작사 : OMO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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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리(OMORI) - 불가역적인 죄를 감각적으로 다루는 법과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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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주2025.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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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리(OMORI) - 불가역적인 죄를 감각적으로 다루는 법과 데미안

왼쪽부터 켈, 오브리, 히로. 꿈을 꾸고 있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현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대로 누워, 꿈과 동화되고 싶다. 오브리가 아직 나를 좋아하는, 따뜻한 마리 누나가 있는 꿈으로 – 오모리(HIKIKOMORI)인 채로

“EVERYTHING IS GOING TO BE OKAY.”
“모든 게 괜찮을거야.”

대부분의 게임과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해피엔딩을 목표로 한다. 적어도 겉으로 그렇게 표상한다. 해피 엔딩이라 함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이야기다. 그런 해피엔딩을 위한 욕구는, 곧 플레이의 이유와 게임 플레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곧 게임의 끝에 해피엔딩이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게임에, 해피엔딩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오히려 기다리는 게 끔찍한 진실 뿐일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동화처럼 해피엔딩을 향하는 플레이를 계속할 수 있을까.

-대왕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오모리를 해봤다는 전제 하에 쓰여졌습니다. 혹시 플레이를 해보시지 않았다면 제발 플레이 한번만 해보세요 제발

1: 연출

좋은 스토리가 있는 게임을 만드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 – 소설, 영화, 시 등등 – 에 모두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 우선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건 당연해 보인다. 둘째는 형식 – 즉 연출이다. 아무리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좋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타노스가 조악한 가면을 쓰고 나온다면 좋은 평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가 음식이라면 연출은 플레이팅, 혹은 포장지이다.

바질과 써니, 오모리, 그리고 꿈 – 연출과 유메닛키

주인공의 이름은 오모리, 은둔 외톨이를 뜻하는 히키코모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와 반대로 현실에서의 이름은 써니다. 바질은 바질의 외형에서 알 수 있듯이, 식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바질과 써니는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게임에서도 알 수 있다. 다시. 꿈속 세계에서는 오모리, 현실 세계에서는 써니다.

꿈속 세계에서 오모리는 써니를 계속 찾아 나선다. 꿈 속 세계에서 바질은 정말 착하다. 혼자 있기를 싫어하는 오모리를 대신해 술래잡기 술래가 되려 하는 등, 소심하지만 착한 캐릭터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바질에게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게 제작자의 가장 잔인한 점 중 하나인 것 같다.(그리고 바질은 귀엽다, 저 얼굴에 남자인게 말이 안 돼 진짜)

플레이의 주요 목표는 사라진 바질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바질을 찾으며 바질을 여러 모험을 한다. 밝고 몽환적인 꿈속 세계에서 오모리는 히로, 켈, 오브리와의 모험을 이어간다. 그러나 플레이 후반부, 소름이 돋았다. 점점 오모리 일행이 바질의 얼굴과 생김새를 잊어버리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바질이 누군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이 모험의 목적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차라리 오모리가 표정이나 대사로 그때에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했으면 이 쎄함이 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모리는 항상 무표정에 대사는 없기에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일절” 없다. 이점이 플레이어의 의문과 쎄함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장치가 아닌가 한다.

유메닛키라는 게임이 있다. 플레이 극 후반부의 연출적 부분에서, 그리고 기괴한 꿈속 세계가 나온다는 점이 게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극 후반부 연출에서 오모리는 계속해서 바질을 찾고, 바질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질은 (끔찍하게..) 죽는다. 그 과정을 5~6번 정도 반복했던 것 같다. 도트에서도 공포는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라며 제작자가 작정하고 넣은 스테이지 같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에서 말해보자.

꿈과 현실의 괴리

오모리가 현실로 돌아올 때, 그러니까 써니로서 처음 깨어나면, 플레이어들은 꽤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느새 켈은 아이에서 훌쩍 커버렸고, 현실에서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 너무 달라진지 오래였다. 인지모르게마누나는어디에도없, 꿈에서 나를 좋아하던 오브리는 방망이를 휘두르며 나와 켈을 노려본다. 오모리는 조금 있으면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다...

이 괴리감은 이전 긴 플레이타임으로 이미 켈, 히로, 오브리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에게 충격을 주게 된다. 또한, 그곳에서는 바질을 찾는데 성공하지만, 바질은 어딘가...이상하다. 오모리를 이상하게 경계하고, 극도로 소심해진 성격을 보인다.

문학에서 중요한 건 항상 불안감, 즉 쎄함 이라고 생각한다. 불안감은 두가지 측면에서 훌륭한 장치라고 생각하는데, 먼저 불안감 자체로 훌륭하다. 그 불안감 자체가 계속 읽고 진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둘째로는 개연성이다. 반전이 있어봐야 그 반전이 있었던 이유를 독자가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반전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헛소리에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항상 쎄함을 독자에게 계속하여 드러내되, 그 쎄함이 반전을 예측할정도로 직접적이지는 않도록 조정해야 한다.

그러한 장치가 이 꿈을 깨는 부분에서 가장 잘 쓰였다고 생각한다. 꿈속과 너무도 다른 현실으로 플레이어들의 머리를 한번 흔들어 놓고, 바질이 오모리를 대하는 태도로 쎄함을 준다. 오모리는 꿈속 세계에서, 이 세계가 꿈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기에, 플레이어는 큰 충격을 얻게 된다. 여기서 제작자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제작자는 쎄함을 줌과 동시에, 플레이어의 시선을 돌려버린다. 당연히 꿈에서 일어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플레이어이기에, 다른사람들은 전혀 달라짐이나 쎄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 공백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플레이어의 몫이고, 이러한 수년의 공백을 통해 쎄함은 던져주면서도 엔딩으로 향하는 진실은 은근슬쩍 숨긴다.

2: 데미안

두 자아의 충돌 – 싱클레어와 데미안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을 싱클레어의 또다른 자아로, 그리고 회상하는 부분을 꿈속 이야기로 해석하는 시점이 있다. 데미안에는 융이나 프로이트의 분석심리학 내용이 거의 그대로 담겨 있고, 또 그것에 꿈을 다루는 내용이 있어 흥미롭게 본 해석이었다. 근데 이렇게 보니 오모리와의 유사성이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 게임 후반부에서 바질을 자꾸 잊어가고, 바질을 찾는데 또 바질이 죽는다. 이 이유는, 꿈속에서 “오모리”와 “써니”의 두 자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이는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바질은 오모리에게 계속해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바질을 찾는 써니 목표와, 바질을 잊고 죽이려는 꿈속 존재인 오모리의 목표가 충돌하는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다. 꿈은 인간의 무의식의 반영이다. 꿈에서 계속해서 바질을 잊고 바질이 죽는것과 마지막 보스가 오모리인 것은 이 사실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갈등이 완전히 데미안의 구조와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주제와 연출이 둘 다 꿈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점. 데미안이 자꾸 싱클레어를 뒤집어 흔드는 모습이, 써니가 오모리를 극복하려는 모습과, 마지막에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키스...(아무튼 에바부인이 전해준 거라고)하는 장면과 써니가 마지막에 오모리를 안으며 오모리가 칼을 내려놓는 장면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어 재밌었다.

하나의 세계를 깨기 위해서는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아야 한다

데미안은 작중에서 신비한 존재로 나온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보고, 나무같기도 하고, 수천년을 산 사람 같기도 하다 라고 묘사한다. 여기서 “선” 과 “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때의 싱클레어는 “선”, 프란츠 크로머는 “악”이다. 싱클레어를 단순히 “선”으로 묘사하기는 무리지만, 크로머에 비교한다면 비교적 “선” 인 것은 확실하다.

싱클레어는 자주 “악”에 끌리곤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데미안이 크로머를 개박살내고 크로머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악”이 사라진 걸까? 아니다! 프란츠의 자리를 데미안이 대신 한 것이다! 데미안의 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카인에 대해 배운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 등, 데미안을 “선”으로 볼 수는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지막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키스하며, 그전에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의 키스는, 선과 악, 두 자아의 통합이자 싱클레어의 성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데미안은 작중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싱클레어는 작품의 끝에서, 하나의 세계를 깨뜨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세계”를 오모리에 적용해본다면 꽤 잘 들어맞는 말이다. 오모리, 아니 “써니”는 마지막, 꿈속에서 기억을 되찾으며, 최종 보스인 “오모리”와 싸우게 된다. 싸움의 끝에서, 써니는 오모리를 안아주고 오모리는 칼을 내려놓으며 “꿈 속 세계”를 빠져나오게 된다. 꿈 속의 자신을 증오하는 오모리와 현실 속의 써니가 서로 합쳐지는 순간, 자아는 통합되고 하나의 세계는 깨진다.

알을 깨고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3. 엔딩을 향한 원동력, 그리고 엔딩

1의 도입에서 주구장창 이야기 했듯이 좋은 이야기와 연출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에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 바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다른 매체들과 달리, 게임은 주도성이 더 강조된다. 다른 매체가 배달 음식이라면, 게임은 식당에 가서 먹는 것이다. 메시지를 얻으려면, 엔딩을 보려면 바깥을 뚫고 음식점에 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정리하고 갈 수밖에 없다. 게임이 좋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연출/원동력 이 필수지만, 좋은 이야기를 빼고 “게임”을 보자. 게임의 본질은 무엇인가? 당연히 “재미”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든 훌륭한 연출이든, 게임성, 즉 재미가 없다면, 게임은 플레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야기하는건 “게임이 좋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원래의 이야기를 돌아와, 원동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제일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게임을 끝까지 하기 위한 원동력은 주로 해피 엔딩에 대한 욕구인 경우가 많다.(아닌 경우도 물론 있다, 언더테일 몰살루트에서의 원동력은 단지 “호기심”이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이 끝이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도 “해피엔딩” 이 나올수 없다면, 플레이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제작자는 어떻게 플레이어를 끝으로, 엔딩으로 데려가야 할까?

잃어버린 기억

게임의 원동력은, 원래는 바질을 찾는 것이였으나, 주인공 일행들이 바질을 아예 잊음으로써원동력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 게임의 원동력이 된다. 그 기억을 찾아갈수록, 끔찍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만, 원동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엔딩으로의 원동력은 바질을 찾는 해피엔딩에서 기억을 찾는 엔딩으로 바뀐 것이다.

해피엔딩이 아닌, 말해야만 하는 굿 엔딩

엔딩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강력한 스포일러를 해야겠다. 제목에서 말한 불가역적인 죄는 무엇일까? 물건을 부수면 물어내고 새것을 사면 되고, 책이 젖으면 다시 쓰면 된다. 그럴수 없는게 하나 있다. 바로 살인이다.

현실에서 마리 누나는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자살한 것으로 위장 당한 것이다. 진실은 이러하다. 마리와 오모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합주 연습을 하던 중, 마리와 오모리는 다투게 되고, 싸우는 과정에서 마리가 계단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그 모습을 오모리에 집에 온 바질이 보게 되고, 바질이 오모리에게 마리를 자살한 것처럼 나무에 매달자는 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둘은 마리를 자살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이 불가역적인 죄, 바질과 연관된 죄책감을 의미한다.

게임의 끝에서 오모리는 병실에서 깨어나게 되는데, 이때 나왔다가 친구들이 있는 병실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굿 엔딩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오모리는 마리에 대한 진실을 친구들에게 말하려고 하며, 그 장면에서 끝이 난다. 쿠키 영상으로는 바질이 웃고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해피엔딩으로 보기도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여러 시각이 있으나, 우리는 이 엔딩에 도달했을 때 도전과제의 이름이 해피엔딩이 아닌 굿 엔딩이라는 것에 주목 해야 한다.

굿(GOOD)이라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나는 선(善)의 의미로 보고싶다. 드디어 오모리는 거짓과 왜곡이 가득한 꿈속을 벗어나, 자신의 죄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고백할지 말지 선택에 기로에 서게 되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선이다. 비록 끔찍한 진실일지라도, 써니를 사랑했던 마리 누나를 위해서라도, 친구들과 영영 헤어지게 될지 몰라도, 써니는 “해피”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닌 “굿”을 향해 간다.

배드엔딩, 그리고 오야스미

여기서 옥상으로 갈 시, 써니는 자살하게 된다. 그리고 오야스미라는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오게 된다. 여기서 오야스미는 일본어로 “잘 자”라는 뜻인데, 가사가 말하지 못한 써니를 대변해주는 듯한 말이 있다. 가사를 한번 보자.

......
おやすみ、おやすみ Close your eyes and you'll leave this dream
잘 자, 잘 자 눈을 감으면 넌 이 꿈을 떠나게 될 거야
おやすみ、おやすみ I know that it's hard to do
잘 자, 잘 자 힘들 거란 거 알아
.....

여기서 힘들 것이라는 것은, 그 사실을 고백하기에 힘들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말하지 못하고 자살한 써니에게 오모리가 말하는 듯 하다. “결국 말하지 못했구나, 그래, 말하는 게 힘들다는거 나도 알아.” 하고 말이다.

4. 총평 – 다회차 게임의 단점을 이겨내는 치밀하고 세밀한 이야기와 연출법

세종대왕님이 책은 고기와 같아 여러번 씹어 먹어야 맛있다 는 말을 했다는 책을 본적이 있다. 실제로 구소구간이라는 책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봤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니, 실제로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게임 또한, 특히 다회차 게임은 여러번 씹으라고 의도하고 만든 게임이다. 하나 단점이 있다면, 다회차 게임에는 “분기”라는게 있는데, 그 부분에서 선택 혹은 그동안의 행적에 따라 스토리나 게임의 방향성이 달라진다. 그러면 그 분기점 까지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임은 그 전까지를 짧게 플레이하도록 유도한다.

언더테일의 경우는 보통 노말-불살-몰살 의 경우로 플레이 하게 되는데, 몰살의 경우는 플레이가 셋중 가장 짧고, 잡다한 이야기들이 전부 스킵된다.(몬스터들을 다 죽여서 그렇다) 이런 예시들과 같이 다회차 게임은 중복되는 부분을 최대한 다르거나 생략하도록 유도한다.

오모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 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오모리의 대사와 컷신은 짧은 편이 아니고 스킵도 불가능 하다. 즉 다회차 플레이를 하기에는 제약이 있다. 한 엔딩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에 20시간 정도, 혹은 그 이상이 소요되니, 단순한 쯔꾸르 게임이라고 얕본다면 더욱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모리는 그 단점을 이야기와 연출로 덮어버리는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세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를 잘 나타내는 연출과, 이를 뒷받침하는 BGM까지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엔딩의 브금을 첨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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