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다.
나는 나를 통해 내 밖의 것들을 안다.
새와 나무, 책과 너는 내 밖에 있을지 모르나,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때, 내가 새의 날갯짓을 동경할 때, 그것들은 더 이상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너가 되고, 나만의 새가 된다.
비단 나의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너가 노래를 들을 때, 너가 찬 바람에 떨 때, 그것들은 너의 노래이고 너의 찬 바람이 된다.
그렇게 각자에겐 각자만의 우주가 있고, 그들은 그들 안에서 살아간다.
그런 즉 너와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곧 전체이다.
(이 뒤에 글을 이어야 할지 아니면 끝내야 할지 잘 모르겠음)
그런데 누군가는 말한다. 나라를 위한 그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수천만 동포의 미래를 위해 희생한 그대의 삶은 동경 받아 마땅한 삶이라고.
그런 삶은 대대로 영웅의 표본으로 전래된다. 자라는 소년들이 그런 영웅가에 매료되도록. 부당한 희생을 찬양하도록.
이러한 숭고함의 논리는 한 사람인 나와 아득히 많은 우리를 전제하며, 은밀히 너와 나의 삶을 일률적인 계산 가능성에 투입 시킨다.
그러나 너와 나의 죽음은 수백의 죽음보다 모자라지 않다. 모든 죽음은 전체의 죽음이다. 너와 나의 죽음은 단지 한 개체의 죽음이 아닌, 온 우주의 사라짐이다.
(이 뒤 부분도 약간 애매함)
우리는 누구든 숭고한 희생을 부르짖는 사람이 나오거든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지키기 위함 뿐만 아니라 나의 너를 지키기 위해서도.
-의도적으로 꼬아봄-
물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언어 일반에 통용되는 ‘세상’과 ‘우주 전체’가 지칭하는 대상은 물자체로의 세상이기 보다는 ‘개개인의 현상세계에 현현된’ 세상과 우주 전체일 수 밖에 없다.